1. 제 목 - 서바이벌 (Survival)
2. 주 제
1) 장르 : SF, 판타지, 액션
2) 주제 : 생존을 위한 투쟁과 화합
3) 대상 : 15세 이상
3. 기 획
목표를 향한 길에는 그것이 유일무이한 것이 아닌 한 언제나 누군가와 대립이 따른다. 그 와중에 조력자가 있을 수 있고 협력도 하게 된다.
그러면서 경험하게 되는 다양한 상황에서 난관을 극복하는 과정이 어쩌면 목표보다 더 중요하게 작용할 수 있다.
목표는 또 다른 목표를 위한 과정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4. 주요설정
제 각각 무술과 병기를 연마한 무술인들.
외계인의 조작에 의해 변신한 로봇과 괴물의 형상들.
5. 줄거리
1막. 제51회 전국무술대회가 개최 예정인 가운데 각 지역의 무술인들의 알력이 인다.
2막. 무술대회가 열리는 중에 광장으로 거대한 운석이 떨어지고, 하늘에서 UFO가 떨어진다.
3막. 외계인에 의해 변신한 로봇과 괴물들이 지구를 파괴하자 무술인들이 맞선다. 지구를 파괴하려는 악한 외계인에 맞서는 부상당한 선한 외계인의 대립이 있다.
4막. 로봇과 괴물들의 본 모습이 인간임이 밝혀지고, 무술인들은 합심하여 선한 외계인을 도와 악한 외계인을 추방한다.
* 대본 작업 (미정)
* 기획하면서 되새겨보니 드래곤볼과 스트리트 파이터를 짬뽕한 느낌이다.
12.27.2017
12.18.2017
11.27.2017
8.29.2017
7.30.2017
헤라 : 인큐베이터
1. 제 목
헤라 : 인큐베이터 (Hera : Incubator)
2. 주 제
1) 장르 : 미래 과학 사회 배경의 드라마, SF
2) 주제 : 인류의 생존 위기와 그에 대한 대처 물색
3) 전개 : ① 접촉성 바이러스에 의한 신체 접촉을 금지당하는 인류
② 섹스, 임신, 출산을 주목적으로 제조된 인조인간 헤라
③ 출생아를 전멸시키려는 헤라의 반란
④ 본능적인 생존 방식에 눈을 뜨는 인류
4) 대상 : 청소년관람불가
3. 기 획
성(性)에 개방적이든, 폐쇄적이든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터부시되는 것은 존재한다. 그것이 유희적 행위가 아닌 생존을 위한 의무일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과연 인류는 인간답게 생존해 가고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생각하면, 과학의 발전으로 평균수명이 연장되고 있음에도 회의를 떨쳐버릴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그런 상실감이 과학을 더욱 발전시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학의 성장을 통한 오만은 자멸을 초래하는 결과를 야기할 수도 있다는 경각심을 주의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인류의 영속적 생존이 보장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던지고 싶다.
4. 주요인물
헤라(Hera) : 정부에서 인간의 출산을 위해 제작된 여자 인조인간, 결혼한 가정에 파견되어 뱃속에서 태아를 수정한 상태로 부부와 같이 생활하면서 인간적 감성을 교류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5. 줄거리
“등장하는 국가, 지역은 실제 국가, 지역과 무관하며 작품의 창작에 이용된 것뿐임.”
2050년 북한, 핵융합 실험실에서 방사능 누출 사고가 나고, 실험실 내에 모기 서 너 마리가 방사능에 노출되어 변이가 발생한다. 모기는 실험실을 빠져나와 인근에 관광 온 관광객 중 한 외국인 남성의 피를 빨면서 방사능 물질을 주입하게 된다. 이 외국인 남성은 북한을 떠나 태국으로 가게 되고, 그 곳의 윤락에 젖어 HIV바이러스 보균자인 여성과 의도하지 않은 성관계를 하게 된다. 남성이 본국으로 돌아 간 후, 이 남성과 성관계를 한 HIV바이러스 보균자인 태국 여성과 접촉한 사람들의 신체에 변화가 생긴다. 신체 접촉만으로 비정상적인 피부 반응이 나타난다. 이후 이 접촉성 바이러스는 감기 바이러스와 결합하여 기침을 통해 기하급수적으로 사람들의 피부를 괴사시킨다. 국가 경계를 너머서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국제 연합을 형성하여 대책마련을 강구한다.
2060년. 공기를 통한 전염은 막았지만, 인간끼리의 신체 접촉은 금지되었다.
2065년 서울, 태양이 작열하는 여름. 사람들은 신체를 최대한 가리고 다닌다.
한 쌍의 남녀가 성관계를 한다. 곧이어 정부 사람들이 여자를 데려간다. 실험실에서 여자의 배를 관찰하며 수정 상태를 확인한다. 여자의 배 부위를 몸에서 분리해 낸다. 인조인간인 여자가 발작을 하며 회로가 폭발을 한다.
2070년 서울 가정집. 한 쌍의 부부와 인조인간 헤라가 함께 생활한다.
헤라의 배는 임신 8개월쯤으로 불러 있다. 부부는 신체 접촉을 자제하면서 헤라의 배를 통해 태아와 교감을 나눈다. 헤라가 출산을 하는 날. 헤라는 프로그램이 꺼진 상태로 보관 창고로 이송되고, 헤라의 배에서 분리된 태반에서 태아가 출생하여 부부와 신체 접촉이 가능한 상태로 갓난아기가 인계 된다. 담당 의사가 마주한 부부에게 인공 수정의 실패과정과 인조인간 헤라를 탄생시킨 배경, 그리고 차세대 인류를 위한 유전자 조작을 통한 출생아 선정 등을 설명하고, 신체 접촉이 가능하게 된 신인류의 출생을 축하한다.
한편, 보관 창고에 보관 중이던 헤라의 시스템이 작동하면서 상실한 태아에 대한 애착과 초기 헤라 모델이 무분별하게 파괴된 모습, 대기 중인 헤라들의 암울한 형색에서 분노를 느낀 헤라는, 가동이 중지된 다른 헤라들을 깨워 인류에 대한 반격을 한다.
- 이하 생략 -
“등장하는 국가, 지역은 실제 국가, 지역과 무관하며 작품의 창작에 이용된 것뿐임.”
* 대본 작업은 미정.
6.14.2017
5.18.2017
5.11.2017
대선 득표율의 이율배반
2017. 05. 09일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됐다. 그 결과는 이러했다.
득표율을 보면서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것은 비단 나만이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인원(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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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율(%)
| |
선거인
|
42,479,710
|
100
|
투표자
|
32,807,908
|
77.2
|
미 투표자(기권)
|
9,671,802
|
22.8
|
당선 득표
|
13,423,800
|
31.6 (내 계산)
40.9 (좌측 수치상)
41.1 (언론)
|
득표율 산정 시 미 투표자 수를 반영하지 않는 것은 득표율을 상향 조정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투영된 집계 방식이라고 생각된다. 혹자가 말하는 대로 기권은 권리의 포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민주주의 하에서는 그것이 허용된다는 것에 재고의 여지가 있다.
첫째, 기권자는 그대로 당선인 선정 결과에 이의가 없다는 자기 소신을 표명한 것이기도 하다. 기권자를 부정하려는 투표자는 당선자를 선출한 투표자이외는 부정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1인을 선택하는 투표에서 당선에 기여하지 못한 표는 어차피 동일한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둘째, 선거의 행위만으로 그로 인한 결과 - 향후 당선인으로 인한 정치적 영향 등등 - 까지 묵살당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당선인이 아닌 다른 후보를 선택한 투표자도 그 영향에 반응할 당연한 권리가 있듯이 기권자도 국민으로서 예외가 아니기 때문이다.
셋째, 선거의 투표만으로 참정권의 전부를 행사하는 것처럼 확대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국민이 정치적 의사를 행사하는 데에 오직 몇 년의 주기로 있는 선거로만 가능하다면 그것이 오히려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첨언하여, 결과적으로, 당선 득표가 선거인 수의 3분의 1수준도 못되는 상태에서 당선이 확정되는 지금의 선거 제도로는 사표(死票)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민주주의 의사 결정 방식인 다수결의 원칙이 억지스럽게 적용되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4.20.2017
시험대에 오른 한국
사고로 인한 인명의 손실에는 사고자의 생애로 인한 경중이 따로 있을 수 없다. 다만, 사회적 관심과 책임 등의 문제로 우선순위는 가능할지 모른다.
굳이 위의 두 사례를 비교하는 것은 인명 사고에 반응하는 국내의 모습에 모순과 위선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세월호 발생 후 3년이 지나도록 그 슬픔을 향유하며 재발 방지를 염원했다지만, 그건 정부에 대한 일방적인 요구에 지나지 않는, 자기 책임 회피에 불과할 뿐이라고 생각된다.
세월호 사고로 인한 손실은 무엇보다 인명임에도 그에 대처하는 자세는 정신적 소모만이 횡행했다고 본다. 피해자의 대부분이 고교생이라는 것에서 오는 연민과 대형 인명 참사라는 것에서 오는 경각심을 정부에 대한 불신과 감정의 남발로 해소하려 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수호할 국가의 책무를 방임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사후 처리가 미흡하면 미흡한 대로 그것이 최선임을 받아들일 수 있는 현실 감각을 직시하자는 것이다. 사실이 사실 같지 않다고 하여 허위를 사실로 위장함으로써 자가당착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 시험대가 스텔라 데이지호를 바라보는 시선이 될 것이다.
그 시험대가 스텔라 데이지호를 바라보는 시선이 될 것이다.
2017년 4월 20일 현재. 대통령 대행 체제 하에서 제19대 대통령 선거운동이 실시되고 있는 상황에서, 대통령 후보자들이 내거는 대선 공약은 결과적으로 무엇을 위한 것인지 묻고 싶다.
대통령 후보자들의 선거 유세 현장에서 먼 타국의 바다에서 침몰한 선박의 국민에 대한 책임은 아직은 없다고 할 것인가?
솔직히 세월호 인양의 목적을 난 잘 모르겠다. 사고자의 유품이라도 바라는 유가족의 자기만족을 충족시켜 주기 위한 것인지, 사고에 대처하는 국가의 의지인지 말이다. 아직도 바다 속에서 슬픔을 삭이고 있는 선박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지 알아 보라. 나아가 앞으로도 그런 사고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근거가 있는지 생각해 보라.
4.10.2017
가치관의 혼동
2017년 3월 10일.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박근혜님이 (이하 ‘님’으로 호칭) 탄핵이 되고, 동년 3월 31일 검찰 수사를 위해 피의자 구속이 된 현재 사회를 바라보면서...
정치에 대해 문외한이면서 님의 인격에 대해 부지(不知)함에도 불구하고 형언하기 어려운 신념이 있었다. 그건 최후의 보루처럼 여긴 믿음의 형태이며,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희망 같은 것이었다. 비록 더 떨어질 데 없는 곳까지 추락하는 느낌이지만 그래도 설마, 설마 하는 마음으로 인터넷을 통해 지리멸렬하게 쏟아지는 정보 속에서 부동(不動)의 의연함을 잃지 않으려 하고 있다.
지금까지 현실화된 사실을 바탕으로 나의 흔들리는 가치관의 혼동을 되짚어 보고자한다.
첫째, 헌법재판관 8인의 전원 찬성으로 결정된 대통령 탄핵.
헌법 제113조 제1항에는 ⌜헌법재판소에서 법률의 위헌결정, 탄핵의 결정, 정당해산의 결정 또는 헌법소원에 관한 인용결정을 할 때에는 재판관 6인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라고 명시된 것처럼 대통령의 탄핵 결정의 형식은 정당했다. 하지만 전원 찬성이란 형태가 민주주의의 의사결정 방식인 다수결의 원칙이라는 측면에서 극명한 느낌을 준다는 것은 떨쳐 버릴 수가 없다. 반대하는 의사가 없었다는 것은 극단적인 의사가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대통령이 탄핵을 당할 만한 잘못을 저지른 것이 당연하든지, 반대로 결정을 내린 헌법재판소 재판관 8인 전체에 중대한 흠이 있든지 말이다. 헌법재판소의 정당성을 부여받기 위해서는 전자가 맞아야 한다. 문제는 그에 대한 국민의 의사도 또한 만장일치가 되어야 합당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처럼 되어버린 양상이다. 민주주의에서 타협이 개입되지 않은 만장일치는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은 나의 착각일까?
헌법 제103조에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라고 했지만, 그 양심이 과연 천만인의 찬성뿐만 아니라 그 반대에도 맞설 수 있는 양심인지 궁금하다. 시대에 따라 판단이 변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고 있다는 것에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둘째, 님에 대한 재판 전 피의자 구속 상황.
범죄 피의 사실에 의한 구속은 필요에 의한 법적 절차 과정이라고 단순히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피의 사실에 대한 증거가 ‘차고도 넘친다.’ 라든가, 조사 자료가 몇 페이지가 된다든가 하는 말들에서 유추되는 의미는 범죄의 명확성이다. 범법자의 범죄가 확실하면 할수록 수사를 위한 피의자 구속은 모순이다. 법을 빌미삼아 재판을 일부러 기다리는 직무유기를 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헌법 제65조 제4항에 ⌜탄핵결정은 공직으로부터 파면함에 그친다. 그러나, 이에 의하여 민사상이나 형사상의 책임이 면제되지는 아니한다.⌟ 라고 하는 말에 담긴 의미에는 탄핵과 민사나 형사의 판단 기준이 다름을 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탄핵된 후에는 책임을 밝히기도 전에 당연히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것처럼 검찰과 탄핵 찬성 측이 다그치고 있는 느낌이다. 또한 탄핵의 책임과 형사상의 책임을 동일 선상에서 바라보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다.
셋째, 일련의 과정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님의 태도.
죄가 진짜로 있다면 체념일 수 있고, 반대라면 억울할 만도 한데, 인터넷에서 보이는 님의 모습은 미동이 없다. 파면당해 일반인이 되었기에 행적을 드러낼 가치(?)가 없는 이유로 외면당하고 있는 것인가? 총체적 책임자로서 님이 스스로 무과실 책임을 자처하려는 것인가?
진실이 그 어느 쪽이든 님의 모습은 참으로 의연하고 담대하게 보인다. 마치 지탄받는 순교자의 모습이 저럴까 싶도록 느껴진다.
우리나라 민심의 방향은 탄핵 찬성과 반대, 관망 혹은 무관심으로 나뉘었지만 결론은 마치 짜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한쪽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 느낌이다. 기독교의 부흥이 있기 전에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 듯이, 한반도의 민주공화 발전을 위해 님이 희생을 무릅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가슴이 아니라 머리가 아려온다.
정치에 대해 문외한이면서 님의 인격에 대해 부지(不知)함에도 불구하고 형언하기 어려운 신념이 있었다. 그건 최후의 보루처럼 여긴 믿음의 형태이며,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희망 같은 것이었다. 비록 더 떨어질 데 없는 곳까지 추락하는 느낌이지만 그래도 설마, 설마 하는 마음으로 인터넷을 통해 지리멸렬하게 쏟아지는 정보 속에서 부동(不動)의 의연함을 잃지 않으려 하고 있다.
지금까지 현실화된 사실을 바탕으로 나의 흔들리는 가치관의 혼동을 되짚어 보고자한다.
첫째, 헌법재판관 8인의 전원 찬성으로 결정된 대통령 탄핵.
헌법 제113조 제1항에는 ⌜헌법재판소에서 법률의 위헌결정, 탄핵의 결정, 정당해산의 결정 또는 헌법소원에 관한 인용결정을 할 때에는 재판관 6인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라고 명시된 것처럼 대통령의 탄핵 결정의 형식은 정당했다. 하지만 전원 찬성이란 형태가 민주주의의 의사결정 방식인 다수결의 원칙이라는 측면에서 극명한 느낌을 준다는 것은 떨쳐 버릴 수가 없다. 반대하는 의사가 없었다는 것은 극단적인 의사가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대통령이 탄핵을 당할 만한 잘못을 저지른 것이 당연하든지, 반대로 결정을 내린 헌법재판소 재판관 8인 전체에 중대한 흠이 있든지 말이다. 헌법재판소의 정당성을 부여받기 위해서는 전자가 맞아야 한다. 문제는 그에 대한 국민의 의사도 또한 만장일치가 되어야 합당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처럼 되어버린 양상이다. 민주주의에서 타협이 개입되지 않은 만장일치는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은 나의 착각일까?
헌법 제103조에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라고 했지만, 그 양심이 과연 천만인의 찬성뿐만 아니라 그 반대에도 맞설 수 있는 양심인지 궁금하다. 시대에 따라 판단이 변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고 있다는 것에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둘째, 님에 대한 재판 전 피의자 구속 상황.
범죄 피의 사실에 의한 구속은 필요에 의한 법적 절차 과정이라고 단순히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피의 사실에 대한 증거가 ‘차고도 넘친다.’ 라든가, 조사 자료가 몇 페이지가 된다든가 하는 말들에서 유추되는 의미는 범죄의 명확성이다. 범법자의 범죄가 확실하면 할수록 수사를 위한 피의자 구속은 모순이다. 법을 빌미삼아 재판을 일부러 기다리는 직무유기를 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헌법 제65조 제4항에 ⌜탄핵결정은 공직으로부터 파면함에 그친다. 그러나, 이에 의하여 민사상이나 형사상의 책임이 면제되지는 아니한다.⌟ 라고 하는 말에 담긴 의미에는 탄핵과 민사나 형사의 판단 기준이 다름을 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탄핵된 후에는 책임을 밝히기도 전에 당연히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것처럼 검찰과 탄핵 찬성 측이 다그치고 있는 느낌이다. 또한 탄핵의 책임과 형사상의 책임을 동일 선상에서 바라보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다.
셋째, 일련의 과정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님의 태도.
죄가 진짜로 있다면 체념일 수 있고, 반대라면 억울할 만도 한데, 인터넷에서 보이는 님의 모습은 미동이 없다. 파면당해 일반인이 되었기에 행적을 드러낼 가치(?)가 없는 이유로 외면당하고 있는 것인가? 총체적 책임자로서 님이 스스로 무과실 책임을 자처하려는 것인가?
진실이 그 어느 쪽이든 님의 모습은 참으로 의연하고 담대하게 보인다. 마치 지탄받는 순교자의 모습이 저럴까 싶도록 느껴진다.
우리나라 민심의 방향은 탄핵 찬성과 반대, 관망 혹은 무관심으로 나뉘었지만 결론은 마치 짜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한쪽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 느낌이다. 기독교의 부흥이 있기 전에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 듯이, 한반도의 민주공화 발전을 위해 님이 희생을 무릅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가슴이 아니라 머리가 아려온다.
1.18.2017
1.11.2017
스스로 부자 되기
부자(富者)의 사전적 의미 : 재산이 많은 사람. (일부 명사)그것이 많은 사람.
- “많다”의 기준은 없다.
- 사람의 의식주에는 나름의 한계가 있다. 옷이 많다하여 한 번에 두벌을 입지 않을 것이요, 음식이 많다하여 두 끼를 한꺼번에 먹지 못할 것이요, 방이 많다하여 돌아다니며 잠을 자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두 손보다 많은 것을 들려고 한다.
- 과시욕으로 장식된 물건은 그 자체의 용도마저 다하지 못한다.
값비싼 골동품 화병에 꽃을 꽂아 놓는 사람이 없는 이유가 그러하고, 값비싼 자동차가 제 속도를 내며 질주하는 것은 영화에서 밖에 보질 못한 것이 그러하다. 그런데도 물건마다 값어치를 애써 매기려고 한다.
- 돈을 씀으로써 행복을 위한 효용이 충족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배가 부름은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 때문이지 그 음식의 가격이 아니기 때문이며,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공기를 호흡하는데 돈이 들지는 않는 이유이다.
- 재물은 그 크기가 있지만 마음은 그 크기를 잴 수 없기 때문이다.
재물은 쓸수록 줄어들지만 마음은 쓸수록 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부자가 되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 것은
부자가 되면, 하기 싫은 것은 하지 않고 하고 싶은 것만 하며, 놀고먹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P.S. 세계 그 어디를 가서 무엇을 취하든 다 내 것이라는 부자의 정점에 서 있다고 상상해 보라.
그리고 그 다음엔 무엇이 더 갖고 싶은지 생각해 보라.
- “많다”의 기준은 없다.
가진 것이 많은 자가 부자가 아니다.
자신의 것을 타인에게 대가없이 주는 자가 부자다.
- 사람의 의식주에는 나름의 한계가 있다. 옷이 많다하여 한 번에 두벌을 입지 않을 것이요, 음식이 많다하여 두 끼를 한꺼번에 먹지 못할 것이요, 방이 많다하여 돌아다니며 잠을 자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두 손보다 많은 것을 들려고 한다.
비싼 물건을 가졌다고 부자가 아니다.
비용을 들이지 않고 용도에 걸맞은 물건으로 조화를 이뤄야 부자다.
- 과시욕으로 장식된 물건은 그 자체의 용도마저 다하지 못한다.
값비싼 골동품 화병에 꽃을 꽂아 놓는 사람이 없는 이유가 그러하고, 값비싼 자동차가 제 속도를 내며 질주하는 것은 영화에서 밖에 보질 못한 것이 그러하다. 그런데도 물건마다 값어치를 애써 매기려고 한다.
많은 돈을 가진 부자는 육체를 기쁘게 할 수 있지만
인간의 행복은 무형의 정신 상태에 있다.
- 돈을 씀으로써 행복을 위한 효용이 충족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배가 부름은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 때문이지 그 음식의 가격이 아니기 때문이며,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공기를 호흡하는데 돈이 들지는 않는 이유이다.
재물이 많다하여 부자가 아니다.
마음이 그지없음이 진정한 부자다.
- 재물은 그 크기가 있지만 마음은 그 크기를 잴 수 없기 때문이다.
재물은 쓸수록 줄어들지만 마음은 쓸수록 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부자가 되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 것은
부자가 되면, 하기 싫은 것은 하지 않고 하고 싶은 것만 하며, 놀고먹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P.S. 세계 그 어디를 가서 무엇을 취하든 다 내 것이라는 부자의 정점에 서 있다고 상상해 보라.
그리고 그 다음엔 무엇이 더 갖고 싶은지 생각해 보라.
1.08.2017
1.06.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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