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하는 자는 뉴스를 보지 않는다.」
삶의 지혜를 추구하는 자를 철학자라고 이른다. 인간의 다양한 생태와 그로 인한 현상들을 분석하며 인간의 본질에 대해 묻고 해답을 찾아 간다. 그것이 철학자의 모습이라면 그 본질에서 파생된 여러 현상을 알리는 것이 뉴스라는 매체이다. 다시 말해서 뉴스는 인간의 본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표현된 형태만을 보여줄 뿐이다. 거기엔 진실과 진리의 문제는 상관이 없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날씨에서, 바람 부는 대로 움직이는 구름에서, 보이는 그 순간만이 문제가 될 뿐이다.
삶을 지혜롭게 살고자 한다면 뉴스를 통해서 진실을 찾으려는 어리석음을 멈추어야 한다. 뉴스를 바깥세상을 바라보는 창문에 비유한다면 지금의 뉴스는 저마다 창문에 색을 입혀 놓으려하기 때문이다. 속담에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럴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뉴스는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색깔에 물들지 않은 투명한 모습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철학 정신을 길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뉴스를 보이는 대로 보지 말고 마음의 귀로 들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많은 장님이 저마다 다른 말을 하더라도 코끼리라는 생각은 똑같이 하고 있으니 말이다.
철학자의 궁극적인 목표는, 그것이 이루어 질 수 없는 희망일지라도, 인간의 삶의 이상향을 꿈꾸는 것이다. 최선의 평화롭고 행복한 모습은 누구나 바라는 것이면서 우리는 그렇지 않은 세계만을 보고 있는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 다음을 예로 보자.
A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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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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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평화로움.
오늘, 평화로움.
무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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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A, B청년이 싸워 B청년이 입원.
오늘, 입원한 청년 측 격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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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뉴스 관계자라면 어느 마을로 취재를 갈 것인지 묻고 싶다.
A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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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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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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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평화로움.
오늘, 평화로움.
무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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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두 청년 화해.
오늘, 평화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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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평화로움.
오늘, 대형 화재사고 발생,
경찰이 B마을 청년 신발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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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묻자. 당신이 뉴스 관계자라면 어느 마을로 취재를 갈 것인가?
C마을의 화재사고는 어떻게 보도하겠는가?
반복해서 이야기 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와 같이 우리가 보는 뉴스는 당연한 것이 된 듯 문제의 현장 내지는 사건 사고가 끊임없이 생산되는 곳만을 보여주려 한다는 것이다. 진정 원하는 A마을의 모습은 볼 수가 없듯이 뉴스를 보면서 저마다 꿈꾸는 이상향을 그리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생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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