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5.2016

아쿠아(Aqua)

1. 제 목 - 아쿠아 (Aqua)


2. 주 제

1) 장르  : 뮤지컬, 판타지
2) 주제  : 실패와 좌절로부터 극복하는 이야기.
3) 대상  : 15세 이상


3. 기 획

원인이 어디에 있든지 우리는 실패와 좌절을 겪으며 살아간다. 그 속에서 새로운 것에 도전하며 가능성을 믿으며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고자 한다.


4. 주요설정

   댄스 위주의 연극(뮤지컬) 단원들.
   공중을 날 수 있는 와이어와 바닥은 거대한 수중 욕조, 벽은 수면이 비치는 거대한 거울로 장식된 특수 3D 무대장치.


5. 줄거리

1막  평범한 뮤지컬(연극) 단원들, 적자에 허덕이는 연출팀.
2막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 흥행성공.
3막  뜻하지 않은 사고로 단원 사망, 단원 해체 위기.
4막  아쿠아(수중) 댄스로 부활.


* 대본 작업 (미정), 영화화 가능성 (1% - 포스팅 했으므로)
* 와이어를 몸에 매달고, 수면에 잠겨 춤추는 단원들의 머리 위를 날며, 수면을 디디며 댄스 포즈를 취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12.19.2016

뉴스에는 이상향이 없다.

「철학하는 자는 뉴스를 보지 않는다.」

삶의 지혜를 추구하는 자를 철학자라고 이른다. 인간의 다양한 생태와 그로 인한 현상들을 분석하며 인간의 본질에 대해 묻고 해답을 찾아 간다. 그것이 철학자의 모습이라면 그 본질에서 파생된 여러 현상을 알리는 것이 뉴스라는 매체이다. 다시 말해서 뉴스는 인간의 본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표현된 형태만을 보여줄 뿐이다. 거기엔 진실과 진리의 문제는 상관이 없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날씨에서, 바람 부는 대로 움직이는 구름에서, 보이는 그 순간만이 문제가 될 뿐이다.
삶을 지혜롭게 살고자 한다면 뉴스를 통해서 진실을 찾으려는 어리석음을 멈추어야 한다. 뉴스를 바깥세상을 바라보는 창문에 비유한다면 지금의 뉴스는 저마다 창문에 색을 입혀 놓으려하기 때문이다. 속담에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틀린 생각은 아니지만 맞다 고도 할 수 없는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게 뉴스이다.
-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럴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뉴스는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색깔에 물들지 않은 투명한 모습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철학 정신을 길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뉴스를 보이는 대로 보지 말고 마음의 귀로 들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많은 장님이 저마다 다른 말을 하더라도 코끼리라는 생각은 똑같이 하고 있으니 말이다.

철학자의 궁극적인 목표는, 그것이 이루어 질 수 없는 희망일지라도, 인간의 삶의 이상향을 꿈꾸는 것이다. 최선의 평화롭고 행복한 모습은 누구나 바라는 것이면서 우리는 그렇지 않은 세계만을 보고 있는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 다음을 예로 보자.

A마을
B마을
어제, 평화로움.
오늘, 평화로움.
무사고.
어제, A, B청년이 싸워 B청년이 입원.
오늘, 입원한 청년 측 격분.

당신이 뉴스 관계자라면 어느 마을로 취재를 갈 것인지 묻고 싶다.

A마을
B마을
C마을
어제, 평화로움.
오늘, 평화로움.
무사고.
어제, 두 청년 화해.
오늘, 평화로움.
어제, 평화로움.
오늘, 대형 화재사고 발생,
경찰이 B마을 청년 신발 발견.

다시 묻자. 당신이 뉴스 관계자라면 어느 마을로 취재를 갈 것인가?
C마을의 화재사고는 어떻게 보도하겠는가?

반복해서 이야기 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와 같이 우리가 보는 뉴스는 당연한 것이 된 듯 문제의 현장 내지는 사건 사고가 끊임없이 생산되는 곳만을 보여주려 한다는 것이다. 진정 원하는 A마을의 모습은 볼 수가 없듯이 뉴스를 보면서 저마다 꿈꾸는 이상향을 그리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생각인 것이다.

12.18.2016

남 탓? 내 탓! - 세월호 사고

2016년이 저물어가는 즈음, 대통령에 대한 탄핵과 탄핵 반대를 외치는 집회를 바라보는 와중에 2014년 4월 16일 발생한 여객선 세월호 사망자 유가족들의 모습도 보였다.
그 당시 세월호 침몰 사건이 보도될 때는 안타까운 마음이 앞섰으며,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사고나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같은 대형 사고가 터진 것으로 단순히 생각했다.


성수대교 사고(1994.10.21.)                                     삼풍백화점 사고(1995.06.29.)

세월호 침몰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영상을 유튜브에서 찾아보던 중 납득되지 않는 장면이 있어서 생각하게 되었다. 1998년 개봉된 타이타닉이라는 영화 장면이 자꾸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세월호 내부모습. 통화내역. 외부모습


영화 타이타닉 내부모습. 외부 모습

배가 침몰해가는 상황에서 세월호의 내부 모습은 너무도 의연(?)해 보인다는 것이다. 당시 연령이 고등학교 2학년 18세. 성년을 불과 2여년 남짓 남겨 놓은 시점이긴 하지만,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위기상황에서 저렇게 말을 잘들을 수 있을까? 싶었다. 아니면 위기상황에  대한 대처능력이 부족했을 수도 있다. 만약 저 상황이 화재로 인한 사고 현장이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불덩이가 피부에 와 닿아야 살고자하는 본능으로 아우성을 쳤을까? 더군다나 그 당시 핸드폰으로 무엇을 했단 말인가? 문자 메시지 흔적으로 미루어보아 분명 외부와 연락이 가능했다는 것은 알 수 있는데 말이다. 연락을 받은 누구하나 구조될 것을 믿으며 탈출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단 말인가? 그때까지도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단 말인가?
사고로 인한 희생자를 추모하고 재발방지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불의의 사고를 당하고 싶지 않은 당연한 자기 보호 본능이다. 하지만 그것을 누구의 책임으로 전가해서는 안 된다. 일부러 사고를 획책(劃策)하지 않는 이상 사고를 바라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사고는 예방이 최선이지 이미 발생한 후에 진상을 규명하는 것은 그 사고로 인한 피해자에게 있어서는 무의미한 일이다. 피해자 입장에서도 되뇌면 되뇔수록 시간을 붙들고 있는 결과만 낳을 뿐이다.


세월호 분향소

1912년 4월 15일 침몰한 여객선 타이타닉(RMS Titanic) 호는 아직도 해저에 묻혀 있다고 한다.


실제 타이타닉 호 해저모습

P.S.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긴 내게는 인간의 생사가 그저 그렇다. 물론 죽음 앞에 측은(惻隱)한 마음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건 아직 살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2.12.2016

반명함, 여권 사진


Old & Now


3 x 4 반명함 크기, 인화는 4 x 6 인치


3.5 x 4.5 여권 크기 (배경은 흰색, 얼굴크기 3.2~3.6cm), 인화는 4 x 6 인치